호주 뜨개 역사 | 한 짝의 양말이 전선에 닿기까지: 호주 전시 뜨개의 사람과 도안
한 짝의 양말이 전선에 닿기까지: 호주 전시 뜨개의 사람과 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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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로 보내는 양말 한 짝은 누군가의 무릎 위에서 끝나지 않았다. 실을 구해 같은 치수로 뜨고, 완성품을 검사하고, 짝을 맞춰 묶고, 바다를 건너 전달해야 했다. 호주 전쟁기념관에는 엠마 로버타 ‘로빈’ 켄들이 사용한 종이 양말 치수 카드가 남아 있다. 카드의 숫자는 개인의 솜씨를 하나의 공동 작업으로 연결한 흔적이다. 1915년 필리가에서 뜨는 사람들의 사진, 1917년 시드니에서 양말을 묶는 사진, 1944년 편물기계 앞의 여성 사진을 따라가며 ‘전시 뜨개’라는 익숙한 말을 구체적인 노동의 순서로 다시 읽는다. [1][2][3]
역사와 배경
제1차 세계대전 초기 호주의 여러 지역에서 군인에게 물품을 보내는 조직이 각각 만들어졌다. 호주 전쟁기념관의 위문품 기금 자료 안내에 따르면 이들을 묶어 호주 위문품 기금(Australian Comforts Fund, ACF)이 출범한 날짜는 1916년 8월 24일이다. 기금은 모금과 구매, 물품 제작, 전방에 가까운 매점 운영까지 맡았다. 그러나 모든 전시 양말이 ACF 창고 한 곳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적십자, 지역의 양말 모금 운동, 학교와 가정의 활동은 겹치면서도 서로 다른 경로였다. 한 단체의 통계로 모든 뜨는 사람의 일을 대표시키지 않는 것이 이 역사를 읽는 첫 규칙이다. [4][5]
전쟁기념관이 보관한 작은 인쇄물의 목록은 의외로 정확한 질문을 던진다. 멜버른 레이디 메이어리스 애국연맹은 1916년 발라클라바 모자, 1917년 엄지가 있는·없는 장갑과 목도리 안내문을 냈다. 1917년 9월에는 두 짝의 양말을 동시에 뜨는 지침도 발행했다. ACF 빅토리아 지부는 1918년 9월 표준 양말 안내문을 냈다. 이는 오늘 남아 있는 인쇄물의 제목과 발행 기록이며, 각 지침대로 실제로 몇 켤레가 완성됐는지는 그 목록만으로 계산할 수 없다. 두 양말을 한 번에 뜨는 방식 역시 모든 자원봉사자가 썼다고 일반화하지 않는다. [4]
뉴사우스웨일스 주립도서관의 ‘우리 병사들을 위한 뜨개’ 사진집 소개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ACF를 위해 뜬 양말이 135만 4,328켤레였다고 적는다. 호주 전쟁기념관의 전시 자료도 같은 수치를 싣는다. 숫자는 규모를 보여 주지만 한 켤레를 만든 사람의 이름, 정확한 작업 시간과 개인별 생산량은 말하지 않는다. 사진집에는 학교, 지역 모임, 양말 모금 창고가 함께 등장한다. 그러므로 ‘애국적 취미’라는 한 마디만으로 재료 조달과 검수, 포장을 맡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지울 수 없다. [5][6]
ACF는 제1차 세계대전 후 1920년 해산했다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다시 활동했다. 전쟁기념관은 1940·1941년의 뜨개 안내 책자와 퀸즐랜드 지부 군인용 도안 책을 수집 목록에 적어 둔다. ‘다시 뜨기 시작했다’는 말은 같은 사람과 도안이 그대로 돌아왔다는 뜻이 아니다. 뒤에 보게 될 1944년 편물기계 사진은 전쟁기 자원봉사의 기술과 조직이 손뜨개 한 종류에만 머무르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4][7]

인물과 노동
전쟁기념관의 종이 자는 제작자의 이름이 미상이라고 적지만 사용자는 엠마 로버타 ‘로빈’ 켄들로 연결한다. 켄들은 해외 복무 중인 호주 병사에게 보내는 위문품 양말을 뜰 때 이 카드를 사용했다. 카드에는 다리 부분을 15인치까지 재는 눈금과, 5인치에서 고무단을 끝내고 12인치에서 뒤꿈치 플랩을 시작하라는 표시가 있다. 한 사람이 실을 쥐고 만든 물건과 규격을 정하는 인쇄물이 만나는 드문 사례다. 이 카드가 켄들의 전체 생애나 뜬 양말의 총수를 알려 주지는 않는다. [1]
퀸즐랜드 주립도서관이 보존한 1916년 7월 사진에는 양말을 뜨는 사람들이 함께 앉아 있다. 사진 설명은 몇몇 사람의 이름을 ‘아마도’라고 적는다. 로버트 헨더슨 부인, 제임스 포사이스 부인, 빅 캠벨 부인, 아이비 필프와 두 미상 인물, 제임스 포사이스라는 표기는 사진 설명의 잠정 식별이다. ‘부인’이라는 당시 호칭을 그대로 옮긴 자료가 개인의 이름을 얼마나 불완전하게 남기는지도 보인다. 사진만 보고 누구의 양말이 누구에게 갔는지 연결하지 않는다. [8]
뉴사우스웨일스 필리가의 1915년 적십자 회원 사진은 지역의 여성들이 함께 뜨는 모습을 남긴다. 사진작가도, 뜨는 사람 각각의 실명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 사진을 ACF의 모임이라고 잘못 적지 않는다. ACF의 통합 시점보다 앞선 1915년 지역 적십자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름이 남은 켄들과 이름이 사라진 필리가의 사람들을 함께 놓으면 ‘누가 뜨개 역사의 주인공인가’라는 질문에 조직의 창립자만으로는 답할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난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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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과 남아 있는 자료
첫 사진의 필리가 적십자 회원은 실과 바늘을 들고 앉아 있다. 전쟁기 구호 뜨개를 한 사람의 영웅담으로 보기 쉬운데, 사진은 같은 장소와 시간에 여러 손이 동시에 움직였음을 보여 준다. 두 번째 사진은 퀸즐랜드에서 양말을 뜨던 사람들이다. 인물 사진의 자세만으로 양말의 코 수나 발뒤꿈치 구조를 알 수는 없으나, 집단 작업과 지역 차이를 비교할 수 있다. 두 사진 모두 양말 완제품의 상세 도안이라는 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2][8]
양말 치수 카드 REL28154는 사진에 담기지 않았지만 기사 중심의 실물 사료다. 고무단과 뒤꿈치의 시작점을 같은 길이로 맞춘다는 것은 완성품의 크기를 서로 비교하고 묶기 쉽게 하는 조건이다. 이 카드만으로 한 짝의 정확한 코 수, 바늘 호수, 뒤꿈치 줄임 방법은 복원할 수 없다. 오늘 도안을 읽는 독자는 치수표와 코 수가 다른 정보라는 점을 여기서 배운다. 전쟁기념관 목록이 가리키는 별도의 뜨개 책을 함께 열어야 구체적인 코 처리 지시를 확인할 수 있다. [1][4]
세 번째 사진은 1917년 5월 시드니 ‘워 체스트’ 양말 모금 운동의 양말 묶음 작업이다. 사진 설명에는 접수한 양말이 12만 5,636켤레라고 적혀 있다. 이 수치는 그 사진의 모금 운동과 시점에 붙은 설명이지 앞서 말한 ACF 전쟁 전체 합계와 동일한 통계가 아니다. 많이 뜬 다음에도 짝을 확인하고 묶는 창고 작업이 있어야 양말은 물품이 된다. 사진의 포장 노동을 단순한 배경으로 보지 말아야 할 이유다. [3][5]
네 번째 사진은 1914~1918년 사이 시드니 캄발라 학교 학생들이 병사에게 보낼 물건을 뜨는 장면이다. 교실과 학교 밖에서도 뜨개가 조직됐다는 자료지만, 사진 속 학생 전원이 양말을 뜨고 있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다섯 번째는 1944년 샘 후드가 촬영한 ACF 자원봉사자들의 편물기계 작업이다. 두 사진은 30년 사이 작업 공간과 도구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집에서 뜨는 한 사람의 대바늘과 기계의 바늘들을 모두 ‘손뜨개 양말’로 뭉뚱그리면 실제 기술 변화가 지워진다. 기계 사진에서도 기종과 코 수를 보이지 않는 도안처럼 지어내지 않는다.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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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으로 다시 읽기
- 1915년 · 필리가 적십자 회원들이 병사용 양말을 뜨는 사진이 찍힌다. [2]
- 1916년 7월 · 퀸즐랜드에서 여러 사람이 양말을 뜨는 사진이 남는다. [8]
- 1916년 8월 24일 · 여러 지역 조직을 묶은 ACF가 출범한다. [4]
- 1917년 5월 · 시드니 ‘워 체스트’ 양말 모금 운동의 묶음 작업이 촬영된다. [3]
- 1917~1918년 · 두 양말 동시 뜨기와 표준 양말 인쇄 지침이 발행된다. [4]
- 1920년 · ACF가 첫 활동을 끝낸다. [4]
- 1939~1946년 · ACF가 다시 활동하며 새 뜨개 안내 책자를 낸다. [4]
- 1944년 · 샘 후드가 자원봉사자들의 편물기계 작업을 촬영한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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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으며
전시 양말은 ‘뜨는 일’과 ‘보내는 일’ 사이를 왕복한다. 켄들의 작은 종이 자, 서로 다른 지역의 모임, 양말을 묶은 창고, 1944년 편물기계가 그 이동의 흔적이다. 전쟁을 미화하지 않고도 이 물건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검수되어 전달됐는지는 자세히 읽을 수 있다. 오래된 양말 도안을 만날 때에는 발행 조직과 연도, 치수와 코 수의 구별, 사진의 기관과 유물번호를 먼저 확인하자. 그러면 이름이 남지 않은 뜨는 사람들의 노동도 조금 더 정확한 자리로 돌아온다.
사진을 읽을 때 사진 1·2는 제1차 세계대전기 서로 다른 지역 모임이고, 사진 3은 ACF가 아닌 ‘워 체스트’ 양말 모금 운동의 창고다. 사진 4는 학교의 전시 뜨개, 사진 5는 제2차 세계대전기의 ACF 편물기계 작업이다. 기사에서 분석한 켄들의 치수 카드는 별도 유물번호와 원본 목록을 자료로 연결한다.
자료와 사진 출처
본문의 번호는 다음 원문 자료를 가리킵니다. 사진의 저작권·이용 조건은 각 사진 아래 원본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