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뜨개 역사와 문화 | 상하이의 실 가게에서 온라인 도안까지: 중국 뜨개를 기록하는 사람들
상하이의 실 가게에서 온라인 도안까지: 중국 뜨개를 기록하는 사람들

실을 고르러 가게에 들어선 사람과 휴대전화에서 도안을 여는 사람이 같은 문화를 공유한다면, 그 둘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중국 뜨개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려는 순간 비단 직조의 고대 유물, 현대의 대바늘 스웨터, 코바늘 꽃이 뒤섞이기 쉽다. 이 글은 먼저 자료가 남은 도시의 실 유통을 살피고, 한 제작자의 작업실과 디지털 도안의 화면으로 천천히 이동한다.
첫 사진은 2007년 충밍의 손뜨개 제작자들이다. 그들의 손에 든 실을 1885년 상하이의 어느 가게에서 샀다고 연결할 자료는 없다. 한 장의 이미지가 역사 전체를 증명하는 대신, 지역과 시대가 다른 기록을 질문으로 잇는 출발점이 된다. [7]
역사와 배경
중국의 비단과 직조 문화는 오래되었지만, 그것이 오늘 말하는 두 바늘 뜨기나 코바늘 뜨기의 연대를 곧바로 입증하지는 않는다. 두 바늘로 고리를 연결하는 편물, 한 바늘로 고리를 만드는 코바늘, 베틀에서 씨실과 날실을 교차하는 직조는 도구와 구조가 다르다. 이 장의 출발점은 거대한 ‘중국 최초’가 아니라 확인 가능한 한 도시의 기록이다. 상하이시가 편찬한 《상하이통지 간부독본》의 ‘니트 제품 업종’ 절은 1880년대 수입 모사가 머리끈으로 쓰였고, 1885년부터는 옷과 모자를 뜨는 데 쓰였다고 기록한다. 1900년 무렵에는 싱성제에 모사를 전문으로 파는 가게가 열 곳이 넘었다. 이것은 상하이 시장의 기록이지, 중국 전역에서 뜨개가 그때 시작되었다는 증거가 아니다. [1]
가게 진열대에 실이 놓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질문이 생긴다. 누가 그 실을 샀고, 누구의 몸에 맞춘 물건을 만들었을까. 지방지는 1934년 ‘꿀벌·여왕·장군’ 같은 상하이산 실 브랜드가 시장에 나왔다고 적는다. 이 기록은 재료를 사고파는 환경의 변화를 말하지만, 각 가정에서 어떤 도안을 읽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같은 절에는 양말·니트 제품의 판매와 공장 생산도 뒤따른다. 손으로 한 코씩 뜨는 행위와 공업적 니트웨어 생산을 한 역사의 장면으로 보되, 같은 작업으로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1]
20세기를 지나며 물건을 만나는 곳은 거리의 상점만이 아니게 되었다. 중국어권 플랫폼 编织人生의 작품 페이지에는 완성 사진, 사용한 실과 바늘, 치수, 제작 후기, 차트가 함께 놓인다. 2020년에 소개한 가디건 한 벌은 M·L 치수와 50g당 110m라는 실 정보를 제시한다. 그 숫자는 장식이 아니다. 같은 사진을 보고 시작한 두 독자가 다른 몸과 장력에 맞게 작업하려면 필요한 정보다. 사이트의 작품과 강좌, 이용자 게시물은 오늘의 실과 도안이 어떻게 유통되는지 보여주는 자료다. 다만 온라인에 남은 게시물만으로 모든 지역의 가정 뜨개를 대표할 수는 없다. [2][3]
최근에는 작품 사진뿐 아니라 설명 언어도 이동한다. 중국에 기반을 둔 Hookok은 코바늘 꽃과 인형, 모자 등의 완성품을 제작하면서 무료 패턴을 영어로 제공한다. 상하이의 모사 상점과 현재의 영문 PDF는 140년 가까운 간격을 두지만, 모두 기술을 전달하는 매체에 의존한다. 한쪽에서는 실과 도구를 구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쪽에서는 줄임말·도식·영상·조립 순서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중국 뜨개의 현대사를 읽을 때 ‘무슨 모양이 유행했나’만큼 ‘어떻게 배웠나’를 묻는 이유다. [4][5]
사진 2는 1900년 무렵 톈진의 양모 창고다. 상하이 지방지가 말한 1900년 싱성제의 모사 전문점과 같은 장소가 아니며, 창고의 양모가 그 상점에 공급되었다는 증거도 없다. 두 자료를 나란히 놓는 이유는 실이 손에 닿기 전 거래·저장·이동의 단계를 거쳤음을 보기 위해서다. 사진의 정확한 연대도 소장처가 붙인 ‘약 1900년’ 범위로만 읽는다. [1][8]
홍콩의 편물 산업은 상하이 지방지의 연장선에 자동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홍콩기억의 전시 기록에 따르면 Fung Chou-yu는 1923년 가우룽 삼수이포에 리쿵만 셔츠·양말 편물 공장을 세웠고, 공장은 편물 속옷과 양말을 생산했다. 전후 중국 상품 전시회에도 참여한 이 기업의 역사는 상업용 편물의 별도 사례다. 2008년 완차이 매장 사진은 이 회사의 후대 판매 공간이지 1923년 공장 사진이 아니다. 본토의 손뜨개 원고에 홍콩을 포함할 때는 시장·행정·자료의 맥락을 구별해 읽어야 한다. [9][12]

홍콩의 공장 편물: 원사에서 속옷까지
상하이의 모사 상점과 홍콩의 공장은 한 국가의 이야기 안에 나란히 놓을 수 있지만, 같은 도시나 같은 유통망으로 묶을 근거는 없다. 홍콩기억(Hong Kong Memory)의 기록은 1923년 심수이포에 세워진 리쿵만 셔츠·양말 공장과 1950년대 편물 공정을 별도의 홍콩 산업 사례로 보여준다. 앞에서 소개한 리쿵만의 전시 참여 기록은 제품과 상표가 대중에게 소개된 장면을 남긴다. 이 기록은 손뜨개 도안의 역사라기보다, 니트 속옷을 기계로 생산하고 판매한 기업의 역사다. Hong Kong Memory의 리쿵만 전시 기록
홍콩기억이 정리한 1950년대 공정은 면사가 공장에 도착한 뒤 완제품이 상자에 들어가기까지를 일곱 단계로 설명한다. 먼저 타래로 온 면사를 보빈에 옮기고, 편직기에 공급할 원뿔형 실패에 감는다. 이어 Tomkin 환편기가 관 모양의 원단을 짠다. 완성된 원단은 위쪽에서 말아 묶고, 옷의 패턴에 맞춰 재단한다. 이 자료는 관형 원단에서 깃과 소매를 잘라 원단 낭비를 줄였다고 설명한다. 다음에는 조각을 봉제하고, 여성용 속옷에는 비단실을 썼다는 기록이 나온다. 마지막 단계는 다림질, 골판지 보강, 상자 포장이다. 이것은 해당 아카이브가 기록한 특정 공정이지 모든 홍콩 공장의 표준이라고 일반화할 수 없다. Hong Kong Memory, ‘Knitting in the 1950s’
‘뜨개’라는 같은 말이 가리키는 제작 방식은 다를 수 있다. 가정의 손뜨개는 바늘에 걸린 코를 한 단씩 이어 옷의 형태를 만들 수 있지만, 이 공정에서는 기계가 원통형 원단을 생산한 다음 옷의 일부를 잘라 봉제한다. 사진 속 기계 한 대만 보고 두 방식이 같다고 말하기보다, 실이 어떤 기계에 공급되고 원단이 어떤 순서로 재단·봉제되는지 따라가야 한다. 아카이브가 제시하는 순서는 기계 편물이 의류 제품으로 바뀌는 과정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작은 공장 한 곳의 성장과 전환
홍콩기억의 구술·회사 기록은 또 다른 사례인 타이힝 편물공장을 통해 소규모 제조업의 변화를 보여준다. 아우콴청과 동업자는 1969년 타이힝을 시작했다. 아우는 편물 기술을 맡고, 화학섬유 수입업체에서 영업을 하던 동업자는 원료 조달과 판매를 담당했다고 기록돼 있다. 처음에는 약 1,000제곱피트 규모의 공장에서 면사·화학섬유·혼방 면을 다루는 기계를 사용했다. 1973~74년 창사완으로 옮긴 뒤 공간을 넓혔고, 이후 이웃 공장 공간을 더 빌려 5,000제곱피트가 넘는 규모로 확장했다. 이 수치는 한 회사의 아카이브 기록이다. 홍콩의 모든 편물 공장 규모를 대표하지 않는다. Hong Kong Memory, 타이힝·이썬 회사 소개
같은 회사 소개는 1980년대부터 1997년까지를 타이힝의 전성기로 부르며, 생산 원단의 약 60%가 유럽·미국 수출용 의류에, 약 40%가 홍콩 내수용 의류에 쓰였다고 전한다. 이 비율은 회사 기록에 나온 설명이지 업계 전체 통계가 아니다. 아우는 해외 잡지를 참고해 원단 유행을 살피고 신축성 있는 편물을 개발해 염색공장과 협력했다고 회고한다. 1990년대 중산·불산에 공장을 세우려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2000년대 타이힝은 이썬 니팅으로 재편되었다. 이후 주문을 받아 원료 공급자, 중국 본토의 편직·염색 공장과 홍콩 고객을 연결하는 중개 역할이 커졌다는 것이 아카이브의 설명이다. 개별 기업의 목소리로 남은 기록이므로 노동자 개개인의 임금·근무시간·안전까지 대신 설명하지는 않는다.
홍콩기억의 의류산업 구술사에서 숙련 노동자 To Sui Wan은 공장 안의 분업과 반장 역할을 설명하고, 내수용과 수출용 제품을 만드는 공장의 차이를 비교한다. 이런 구술은 회사 연혁에 잘 남지 않는 작업 조직을 보완한다. 다만 한 사람의 경험을 모든 노동자의 경험으로 확장하지 않고, 인터뷰의 관점과 범위를 함께 적어야 한다. Hong Kong Memory, 의류산업 구술사
이 사례가 더하는 맥락. 중국 편에서 홍콩 기록을 읽을 때는 상하이의 실 시장, 홍콩의 공장, 온라인 도안 플랫폼을 한 줄로 이어진 단일한 발전 경로처럼 만들지 않는 편이 정확하다. 서로 다른 도시의 자료는 각자의 시기와 제도를 보여준다. 이 글의 홍콩 부분은 그중 기계 편물과 제품 생산, 기업 규모 변화에 초점을 둔다. 기존의 상하이·온라인 도안 흐름과 함께 보면, 재료를 파는 가게와 디지털 패턴 사이에 제조 공정과 노동의 층위가 있었음을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인물과 노동
왕화민(王华民)의 작업은 편물을 옷에서 그림으로 이동시킨다. 编织人生이 실은 2016년 인물 기사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 자수와 종이 공예를 좋아했고, 1990년대에는 여러 실 색을 섞어 풍경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러시아 회화집을 보고 좌표를 직접 만든 뒤 한 코씩 화면을 옮겼다는 일화도 나온다. 《삼월》과 《참나무》 같은 작품 제목이 제시되지만, 기사 속 평가를 독립된 미술사적 판정처럼 받아들이기보다 제작자가 어떤 문제를 풀었는지 살펴보자. 그림의 색면을 실로 바꾸려면 색의 경계, 코의 비율, 실의 두께를 동시에 다뤄야 한다. [6]
이런 작품에서 ‘작가’는 도안 이름 옆에만 남지 않는다. 좌표를 만들고 색을 골라 작은 견본을 고치는 사람이 있다. 또 다른 제작자는 자기가 뜬 옷의 실제 치수를 적어 올리고, 읽는 사람이 실패한 부분을 댓글에서 바로잡는다. 编织人生의 게시물에는 개인의 도안과 수정 과정, 완성 착용 사진이 함께 축적되어 있다. 그래서 이 플랫폼을 단일 디자이너로 소개하는 대신, 이름이 보이는 기여자와 자료를 정리하는 편집자의 공동 작업으로 읽는다. [2][3]
Hookok의 ‘소개’ 페이지에는 제니(Jennie)를 창립자이자 색 조합에 관심이 많은 디자이너로, 엘르(Elle)를 패턴 디자이너로, 에마·맨디를 편집자로, 킴을 영상 담당자로 적어 놓았다. 팀의 자기소개이므로 각자의 생애나 업적을 과장하지 않는다. 다만 한 장의 코바늘 꽃 도안 뒤에 설계, 문장 편집, 촬영과 영상 제작이라는 서로 다른 노동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에는 유용하다. ‘중국의 뜨개 인물’을 찾을 때 유명 작가 한 명뿐 아니라 이처럼 보이지 않는 제작 과정을 함께 기록해야 한다. [4]
홍콩기억 자료에 남은 Fung Chou-yu는 수공 도안을 디자인한 사람으로 소개되지 않는다. 그가 세운 리쿵만 공장은 1923년부터 셔츠·양말·속옷을 생산한 제조 조직으로 기록된다. 창업자의 이름이 남는 동안 실제 편물기계를 운용하고 조각을 잇고 포장한 작업자의 이름은 이 짧은 전시 설명만으로는 알 수 없다. 인물사를 쓸 때 보이는 창업자와 보이지 않는 노동자의 차이를 함께 적어야 한다. [12]

작품과 남아 있는 자료
왕화민의 풍경 편물을 볼 때는 그림을 ‘실로 복제했다’는 감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실의 한 가닥은 물감처럼 얇게 펴지지 않고, 코의 폭과 높이도 같다 할 수 없다. 색 전환이 너무 잦으면 뒷면에 실이 길게 떠서 편물이 당겨진다. 반대로 몇 가지 색을 함께 잡거나 배색의 경계를 조정하면 화면에 깊이가 생긴다. 기사 속 ‘혼색’이라는 단어가 흥미로운 까닭은 재료의 제약을 표현의 방법으로 돌린다는 데 있다. 이것은 회화와 뜨개의 우열이 아니라 서로 다른 구조의 번역 문제다. [6]
스웨터나 가디건 도안은 완성 사진보다 숫자부터 읽는 편이 안전하다. 실의 길이와 중량, 바늘 굵기, 세탁한 견본의 10cm당 코·단 수를 기록하고 자신의 가슴둘레와 완성 치수를 비교한다. 编织人生의 가디건 예시는 두 치수의 차이를 명시한다. 중국어 ‘棒针’은 대바늘, ‘钩针’은 코바늘을 가리키므로 번역 도중 두 도구를 바꾸어 이해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图解’가 있는 글이라도 약어 범례, 진행 방향, 실제 완성 사진이 함께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3]
Hookok의 백합 PDF는 입체 코바늘을 읽는 다른 순서를 보여준다. 꽃잎과 수술을 따로 만든 뒤 줄기에 배치하고, 실로 감거나 접착하는 조립 단계가 있다. 그래서 완성 사진만 보고 ‘한 번에 뜬 꽃’이라고 짐작하면 실제 제작 구조를 놓친다. 꽃잎의 개수만 세기보다 어느 부품에 철사나 막대가 들어가는지, 수술의 높이가 꽃잎과 어떻게 어울리는지, 줄기에서 어떤 부품을 먼저 고정하는지 살펴보자. PDF의 영문 지시와 사진 순서를 대조하면 평면의 코가 어떻게 공간 속 꽃이 되는지 보인다. [5]
다섯 사진은 각기 다른 자료다. 충밍의 손뜨개 장면, 톈진의 양모 창고, 홍콩 매장, 중국산 평편기, 홍콩의 교육장 사진이다. 왕화민의 풍경 편물이나 Hookok의 백합 원작을 촬영한 자료는 아니다. 특히 사진 4의 전산 평편기는 파일 설명에 ‘중국산’이라고 적혀 있을 뿐 중국 어느 도시의 공장에서 찍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기계가 상하이 지방지의 1934년 실과 직접 이어진다고 주장할 수 없다. 사진 5의 교육장은 홍콩 의류산업훈련국의 2008년 공개 행사로, 지금의 교육 과정이나 본토의 모든 편물 공장을 대표하지 않는다. [7][8][9][10][11][13]
손으로 만든 스웨터와 기계로 짠 옷의 코는 모두 실의 고리이지만 설계·생산·검수의 규모가 다르다. 도안을 읽는 사람은 완성 치수와 게이지부터 보고, 기계 편물을 살피는 사람은 편직 폭과 조직, 여러 조각의 연결 방식까지 본다. 编织人生에 실린 2023년 ‘목련 가디건’ 사례는 가슴둘레 110cm, 본체 4mm·가장자리 3.5mm 바늘, 10cm당 23코·27단이라는 수치를 함께 적는다. 사진이 비슷해도 이 숫자가 달라지면 옷의 폭과 길이가 달라진다. 2020년의 M·L 가디건과도 서로 다른 제작자·작품이므로 치수를 섞지 않는다. [3][14]

시간으로 다시 읽기
- 1880년대 · 상하이에서 수입 모사가 머리끈으로 유통되었다는 지방지 기록이 있다. [1]
- 1885 · 상하이 지방지는 모사가 의류와 모자 뜨기에 쓰이기 시작했다고 적는다. [1]
- 1900년 무렵 · 싱성제에 모사 전문점이 열 곳 이상 있었다. [1]
- 1923 · 홍콩 삼수이포에 리쿵만 셔츠·양말 편물 공장이 세워졌다. 상하이 지방지와는 별도의 홍콩 기록이다. [12]
- 1934 · 상하이산 모사 브랜드 ‘꿀벌·여왕·장군’ 등이 등장했다. [1]
- 1990년대 · 왕화민이 실의 색을 섞어 풍경을 표현하는 방법을 발전시켰다고 2016년 인터뷰가 전한다. [6]
- 2020년대 · 작품 게시물과 무료 PDF가 치수·기호·조립 과정을 온라인에서 전달한다. [3][5]

다시 읽으며
상하이의 지방지는 실이 머리끈의 재료에서 옷을 뜨는 재료로 넓어졌던 시장의 변화를 남겼다. 왕화민의 이야기는 그 실이 몸을 감싸는 데서 더 나아가 풍경과 빛을 표현하는 재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의 가디건 도안과 백합 PDF에는 다시 다른 역사가 담긴다. 치수를 기록한 제작자, 꽃잎의 조립 순서를 설명한 디자이너, 문장을 다듬고 영상을 만든 사람들의 일이 한 화면에서 독자를 만난다. 세 기록을 잇는 것은 특정 문양이나 하나의 ‘중국식 뜨개’가 아니라, 재료를 얻고 기술을 배우고 결과를 나누는 방법의 변화다.
그래서 중국 뜨개의 역사를 읽는 가장 좋은 출발점은 기원을 단정하는 일이 아니다. 지방지가 말해 주는 범위를 지키고, 작품을 만든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고, 도안 속 숫자와 조립 순서를 실제 손의 움직임으로 되짚는 일이다. 상하이의 실 가게 앞에서 시작한 이 글이 백합 한 송이의 줄기에서 끝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뜨개 문화는 완성 사진 한 장보다, 그 물건에 이르기까지 누적된 선택과 설명 속에 더 선명하게 남는다.
사진을 읽을 때 사진 1은 2007년 충밍의 손뜨개, 사진 2는 약 1900년 톈진의 양모 창고다. 두 도시의 실이 실제로 거래되었다고 입증하는 자료는 없다. 사진 3은 2008년 홍콩의 리쿵만 매장, 사진 4는 중국산 Guosheng 평편기(촬영지는 미확인), 사진 5는 2008년 홍콩의 편물 교육장이다. 왕화민의 편물 그림이나 Hookok 백합 도안의 원본 이미지는 재사용 권리가 확인되지 않아 싣지 않았다.
자료와 사진 출처
본문의 번호는 다음 원문 자료를 가리킵니다. 사진의 저작권·이용 조건은 각 사진 아래 원본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자료 1 · www.shanghai.gov.cn
- 자료 2 · www.bianzhirensheng.com
- 자료 3 · www.bianzhirensheng.com
- 자료 4 · hookok.com
- 자료 5 · hookok.com
- 자료 6 · www.bianzhirensheng.com
- 자료 7 · commons.wikimedia.org
- 자료 8 · commons.wikimedia.org
- 자료 9 · commons.wikimedia.org
- 자료 10 · commons.wikimedia.org
- 자료 11 · commons.wikimedia.org
- 자료 12 · slscdn.hkmemory.hk
- 자료 13 · www.cita.org.hk
- 자료 14 · www.bianzhirenshe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