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뜨개 역사와 문화 | 검은 어부 스웨터가 국가의 전통이 되기까지: 박물관 유물로 읽는 네덜란드
검은 어부 스웨터가 국가의 전통이 되기까지: 박물관 유물로 읽는 네덜란드

네덜란드의 오래된 뜨개를 짙은 남색의 어부 스웨터 한 벌로만 기억하면 이상한 점이 생긴다. 18세기 초의 아주 얇은 흰 면 아기 재킷도 남아 있고, 20세기 볼렌담의 검은 스웨터는 한때 일요일과 육지에서 입던 옷이었다. 마르컨 섬에서는 겉옷의 소매를 보호하려고 별도 소매를 만들어 달았다. 편물은 '국민 무늬'가 아니라 몸과 일, 계절과 세탁에 맞춰 계속 바뀌었다. 박물관의 물건 세 가지를 나란히 놓고 도안이 어떤 문제를 풀었는지 살펴보자. [1][2][3]
역사와 배경
모데뮈즈의 편물사 개관은 네덜란드에서 1500년 무렵 일반적인 옷감이 주로 직물이었고 16세기에 두 바늘 편물이 확산했다고 설명한다. 초기의 비싼 편물 장갑은 상류층의 신분 표현이었으며, 작업한 사람 가운데는 남성 전문 편물가도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를 거치며 쓰임은 더 넓어졌다. 이를 근거로 현재의 해안 스웨터가 16세기부터 그대로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남아 있는 물건의 시기와 용도가 다르다. [4]
프리슬란트박물관의 1716~1725년 흰 면 아기 재킷은 초기 기술의 놀라운 예다. 모데뮈즈의 연구 글은 실이 매우 가늘어 기계 편물처럼 보이지만 손으로 떴다고 설명한다. 목둘레에서는 코를 줄이고, 어깨에서는 코를 마감했으며, 진동에서 다시 코를 주워 소매를 원통으로 떴다. 앞뒤와 소매에 여덟 잎 별의 안뜨기 테두리를 넣었다. 오늘의 스웨터와 닮은 기술이 이미 있었지만 이 옷은 아기의 속옷 또는 실내용 옷이었다. '기술이 오래됐다'는 것과 '같은 옷의 사회적 역할이 오래됐다'는 것은 다르다. [5]
해안의 스웨터는 다른 경로로 생겼다. 모데뮈즈는 네덜란드 어부의 편물 외의가 영국의 간지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적는다. 자국 각 항구에서 무늬와 의미를 바꾸어 썼으며 대략 1860년부터 1950년 사이 작업복이나 격식 있는 옷으로 입었다. 항구마다 하나의 고정된 가문 문양을 암기하는 방식보다 실제 유물의 장소와 날짜를 확인해야 한다. 1815년 세관 기록에 아이슬란드 스웨터가 물건 이름으로 이미 나타난다는 연구도, 옷과 단어가 해상 교역을 따라 움직였음을 일러 준다. [1][5]
볼렌담의 기록은 같은 옷의 기능도 시간이 지나며 바뀜을 보여 준다. 자위더제박물관의 소장번호 011456 검은 어부 스웨터는 1900년 이후 지역 복식에 들어왔고, 처음에는 육지나 일요일에 입다가 1920년 무렵 작업복으로도 쓰였다고 설명된다. 얇은 검은 모사를 원통으로 뜨고 겉뜨기 띠와 씨드 스티치 띠를 교차했다. 네덜란드 야외박물관이 소장한 어린이 스웨터 K.26-69는 1945~1969년으로 기록되며, 소년들도 이런 종류의 옷을 입었다는 단서를 준다. 두 자료는 '어부 스웨터=성인 남성 바다 작업복'이라는 단순한 등식을 깨뜨린다. [2][6]

인물과 노동
해안 편물가의 이름은 많은 유물 목록에서 빠져 있다. 그 공백을 모든 사람이 같은 도안을 대대로 뜬 듯한 이야기로 채우는 것도 위험하다. 의복 자료를 살펴 도면으로 옮긴 스텔라 루허의 2015년 책은 네덜란드 55개 어촌의 역사적 스웨터 65벌을 다루는 연구·재구성 자료로 국립미술관 도서관에 기록되어 있다. 원래 옷의 편물가와 현재 차트를 만든 저자의 역할은 다르다. 책의 수치는 조사 대상의 폭이지 55개 지역의 모든 사람이 고유 문양 하나씩을 가졌다는 증거가 아니다. [7]
마르컨의 별도 소매에는 드물게 두 여성의 이름이 남았다. 자위더제박물관의 소장품 022890 설명에서 기증자 게르티에 제이만피서르는 어머니가 소매를 만들고 자신이 테두리를 떴다고 회상한다. 목록은 어머니 마레티에 피서르판알터나의 이름도 함께 싣는다. 겉옷 소매가 더러워지는 것을 막고 쉽게 갈아 세탁하려던 부분품이 점차 일요일 장식으로 옮겨갔다. 한 물건 안에서 모녀의 노동과 용도 변화가 읽힌다. [3]
20세기에는 편물의 독자도 달라졌다. 모데뮈즈는 실 회사 에버래스팅이 1934년 《Praten en breien》을 냈다고 적는다. 잡지의 출현은 몸으로 전하는 기술에 인쇄된 지시를 더했다. 전쟁 뒤 기성복이 귀하고 비쌀 때 집에서 아이 옷을 뜨는 수요도 컸다. 박물관의 유물, 연구자가 만든 차트, 실 회사의 잡지는 모두 도안의 다른 형태이며, 한 편물가의 이름을 다른 편집자의 이름으로 바꾸어 적어서는 안 된다. [4][7]

작품과 남아 있는 자료
1716~1725년의 면 아기 재킷을 현대 독자가 다시 설계한다면 먼저 실과 형태를 구분해 보자. 매우 얇은 면사의 손뜨기라는 재료 정보는 중요하지만, 원본 사진만으로 정확한 바늘 호수와 장력을 알아낼 수 없다. 목둘레와 어깨의 줄임, 진동에서 코를 줍는 순서, 소매의 원통 작업은 바느질로 잘라 만드는 재킷과 다른 뜨개의 구조를 알려 준다. 본문의 사진은 박물관이 제시한 역사 물건이지 이를 그대로 뜰 수 있는 무료 도안이 아니다. [5]
볼렌담 검은 스웨터에서는 화려한 케이블보다 조직의 교대를 보자. 얇은 검은 모사의 원통 편물, 겉뜨기와 씨드 스티치의 가로 띠, 목을 두른 마감이 눈에 들어온다. 같은 지역 어린이 스웨터는 겉뜨기와 안뜨기의 변형으로 띠를 만든다. 박물관의 설명만으로 이 두 벌을 같은 가문 작품이라 묶을 근거는 없다. 실루엣과 조직, 입은 시기와 사람을 차례로 확인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2][6]
마르컨의 소매는 '스웨터 한 벌'이라는 단위를 흔든다. 겉옷에 붙인 별도 편물 소매는 더러워진 부분만 갈거나 세탁하게 해준다. 검은 안쪽과 흰 테두리의 대비, 여러 가지 별명을 가진 가장자리 무늬는 실용적인 보호물에 장식의 자리를 만들었다. 기증자의 회고에는 테두리를 네 바늘로 원통 뜨기 하고 위쪽에 톱니 모양의 마감이 있었다는 내용도 남는다. 박물관 설명에 없는 코 수를 지어내는 대신 이 구조의 원리를 읽는 것이 좋다. [3]
사진 5의 암스테르담박물관 소장 소매 한 쌍은 1890~1910년 유물이다. 흰 면실로 구멍무늬 뜨기를 하고 아래에는 다른 조직의 무늬를 더했으며 가장자리에는 코바늘 레이스를 붙였다. 그러므로 소매 전체를 코바늘 레이스라고 부르면 두 기술의 결합이 사라진다. 마르컨의 검은 별도 소매와 이 흰 소매는 장소와 제작 시기, 소장처가 다르다. 사진 1의 스헤베닝언 스웨터는 몸통 아랫부분의 평편뜨기와 윗부분의 꽈배기, 그 사이의 지그재그 띠를 비교할 자료다. 지역 구성에 개별 편물가의 변주가 있었다는 박물관 설명을 읽으면, 항구마다 모든 옷이 한 장의 고정 도안으로 제작됐다는 생각도 조심하게 된다. [8][9]

시간으로 다시 읽기

다시 읽으며
네덜란드의 뜨개는 외국의 간지를 받아들여 자기 해안에 맞춘 스웨터, 아주 이른 면 아기옷, 쉽게 갈아 끼우는 소매, 종이 잡지의 도안이 함께 만든 역사다. 다음 사진을 볼 때는 '네덜란드식'이라는 큰 이름보다 소장번호, 항구, 착용자, 재료와 조직을 먼저 적어 보자. 이름이 확인되는 편물가와 후대의 도안 연구자를 구별하면 한 나라의 기술은 훨씬 또렷해진다.
사진을 읽을 때 사진 1은 스헤베닝언 어부 스웨터 HM.936, 사진 2는 볼렌담 성인용 검은 스웨터 011456, 사진 3은 마르컨의 별도 소매 022890, 사진 4는 볼렌담 어린이 스웨터 K.26-69, 사진 5는 암스테르담박물관 소장 흰 면실의 구멍무늬 소매 KA 12890이다. 다섯 유물의 지역·시기·착용자와 소장처를 구별한다. 본문에 설명한 1716~1725년 프리슬란트 아기옷의 박물관 사진은 In Copyright로 표시되어 싣지 않았다.
자료와 사진 출처
본문의 번호는 다음 원문 자료를 가리킵니다. 사진의 저작권·이용 조건은 각 사진 아래 원본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