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뜨개 역사 | 보후스 뜨개의 엠마 야콥손: 한 벌의 스웨터를 가능하게 한 노동의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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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후스 뜨개의 엠마 야콥손: 한 벌의 스웨터를 가능하게 한 노동의 설계

시대 1883년 빈 출생 · 1936년 지역 여성의 요청 · 1939~1969년 보후스 스티크닝
인물 엠마 샤를로테 야콥손, 아우구스타 텡, 헬가 칼손, 클라라 카발린, 마리아 보이에 아프 옌네스, 그레타 발만과 지역 편물 노동자들
주요 유물 1939년 장갑·양말, 1944년 백화점 패션 사진, 1946년 NK 전시, 보후스 편물 라벨

1944년 보후스 카디건을 착용한 패션 사진
사진 1. 1944년 보후스 카디건을 착용한 패션 사진 · © Erik Holmén / Nordiska museet · CC BY 4.0 (원본·이용 조건)

스웨터 한 벌의 무늬를 보며 ‘누가 디자인했을까’라고 묻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스웨덴 보후스 뜨개에서는 그 앞에 질문 하나가 더 있다. 누가 이 스웨터를 집에서 뜰 수 있도록 실을 보내고, 완성품을 검사하고, 값을 받을 곳을 만들었을까. 엠마 야콥손은 그 체계의 중심에 있었다. 그렇다고 혼자 가난한 여성들을 구했다는 영웅담으로 끝낼 수는 없다. 먼저 일을 요청한 여성들의 이름과 이후 수백 명의 제작자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진 한 장의 아름다운 요크 뒤에 있는 주문, 원사, 교육, 임금, 판매의 연결을 따라가 보자. [1][2]

역사와 배경

엠마 샤를로테 야콥손은 1883년 빈에서 태어났다. 스웨덴 여성인명사전은 그녀가 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말테 야콥손과 결혼해 예테보리로 옮겼다고 기록한다. 출생지 때문에 이 글의 스웨덴 인물 선정이 어색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조직한 것은 보후슬렌의 여성들이 손으로 뜨고 예테보리에서 관리하며 스웨덴 안팎에서 판매한 20세기 스웨덴 편물 사업이다. 개인의 출생과 사업의 지역을 구분해야 한다. [1]

출발점은 1936년 파겔비켄의 아우구스타 텡과 헬가 칼손이 엠마에게 지역 석공 가족의 여성들이 집에서 할 수 있는 유급 일을 부탁한 일이었다. 불황으로 보후슬렌의 채석장 일감이 줄어든 때였다. 엠마가 곧바로 유명한 앙고라 스웨터를 제안한 것은 아니다. 교사 클라라 카발린이 먼저 섬유 작업 수업을 맡았고, 봉제 장난감과 크리스마스 장식에 이어 1938년에는 장갑과 양말을 뜨는 수업이 열렸다. 보후슬렌 박물관 역시 첫 제품이 두꺼운 울 장갑·양말이었다고 적는다. 독창적인 고급 요크 스웨터는 이 작은 유급 작업의 다음 단계에서 나타난다. [1][2]

1939년 가을 보후스 스티크닝 협회가 만들어졌다. 여성인명사전의 구체적 기록을 따르면 첫 구성 회의는 1940년 10월이다. 기관마다 ‘시작’의 날짜가 조금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결성, 첫 판매, 회의가 서로 다른 사건이기 때문이다. 처음 여섯 해 동안 36곳에서 수업이 열렸고 483명이 편물 교육을 받았다는 수치가 남아 있다. 수업이 끝나면 지역 담당자가 제작자와 예테보리 본부 사이를 이었다. 본부는 실과 도안을 보내고 완성품을 받아 검사한 뒤 판매처로 넘겼다. 박물관 기록은 월례 모임과 일주일의 휴가도 여성들에게 드문 사회적 기회였다고 설명한다. [1][3]

실의 변화는 사업의 야심과 위험을 함께 보여 준다. 처음에는 튼튼한 울을 쓰다가 고급 울과 앙고라 혼방으로 옮겨 갔다. 여성인명사전에 따르면 1942년 크리스티네룬드 앙고라 방적소의 그레타 발만이 공급을 맡았고, ‘eja’라고 불린 실은 좋은 울 70%, 앙고라 30%였다. 핀란드의 마리아 보이에 아프 옌네스도 실을 염색·방적해 보후스에 공급했다. 다만 전쟁기인 1942~44년에는 공급이 끊겼다는 사전 기록이 있다. 이것은 ‘스웨덴 지방의 토종 무늬와 실만으로 만든 옷’이라는 단순한 설명을 바로잡는다. 편물은 국경을 건너온 원료와 여성들의 기술에 기대었다. [1]

1946년 NK 백화점 보후스 뜨개 전시
사진 2. 1946년 NK 백화점 보후스 뜨개 전시 · E. Holmén / NK 기록 · 스웨덴 사진 퍼블릭 도메인 (원본·이용 조건)

인물과 노동

엠마는 1939년 첫 장갑을 들고 스톡홀름으로 가서 판매처를 찾았다. 스웨덴 여성인명사전은 그녀가 원료, 디자인, 제작, 검수, 진열, 판매에 모두 엄격했다고 평한다. 이 평가는 그녀의 업무 범위를 보여 주지만, 실제 옷의 모든 코를 엠마가 설계하거나 떴다는 뜻은 아니다. 보후슬렌 박물관은 엠마가 초기 도안을 만들었고 뒤에 베라 비우르스트룀, 안나리사 만하이머 룬, 안니카 말름스트룀 블라디니, 케르스틴 올손, 카린 이바르손 등 전문 디자이너를 기용했다고 적는다. 각 작품의 제작자와 도안 설계자는 분리해서 확인해야 한다. [1][3]

1944년 사진 1의 카디건을 입은 모델은 ‘엠마의 직접 도안’을 증명하는 인물이 아니다. 박물관 사진 기록은 그것을 보후스 방식의 편물로만 설명한다. 1946년 사진 2의 회색 스웨터와 머리장식에는 훨씬 구체적인 이름이 있다. 공용 사진 설명은 무늬가 안나리사 만하이머 룬의 구상이라고 적는다. 한 협회의 옷이라도 디자이너 이름을 빼고 모두 설립자에게 돌리면 기록에서 또 다른 여성의 노동이 지워진다. 사진 3·4는 편물의 표면, 사진 5는 의류 라벨이다. 표면을 만드는 제작자와 브랜드를 만드는 조직이 다른 역할을 했다는 점을 한눈에 비교하게 한다. [3][7][8][9][10][11]

1950년 엠마는 전 남편의 관저에서 나오면서 사업을 굴드헤덴의 새 공간으로 옮겼다. 여성인명사전은 그 공간에 섬세한 울을 위한 습도와 조명 관리가 가능했다고 기록한다. 같은 때 엠마는 자신의 일에 보수를 받기 시작했다. ‘자선’이라는 말이 조직을 운영한 여성의 전문 노동까지 무급으로 만드는 위험을 여기서 본다. 1950년대 보후스 옷은 세계 여러 나라로 팔렸지만 1960년대에는 높은 제작 난도, 재료 공급, 임금 상승을 따라가지 못한 보수, 새 섬유와 유행이 겹쳤다. 1969년의 종료를 ‘사람들이 손뜨개를 잊었기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사업의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이 흔들린 것이다. [1][2]

보후스식 배색무늬 베레모의 후대 촬영
사진 3. 보후스식 배색무늬 베레모의 후대 촬영 · © Eskil Malmberg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원본·이용 조건)

작품과 남아 있는 자료

1944년 북유럽 박물관 소장 패션 사진은 보후스 카디건을 스커트, 목도리, 장갑과 함께 입은 모습을 보여 준다. 사진의 목적은 특정 코를 셀 수 있게 찍은 도안 기록보다 옷을 어떻게 팔고 입었는지 보여 주는 패션 이미지에 가깝다. 1946년 NK 백화점 아트리움 전시 사진은 한 벌의 점퍼와 머리장식을 전시장에서 배치한다. 보후스 옷이 지역의 구호 물품을 넘어 도시의 고급 소비 공간으로 들어간 물증이다. 그렇다고 촬영된 옷의 판매가나 실제 제작 임금을 사진만으로 알 수는 없다. 그 질문은 별도 회계 자료가 필요하다. [1][7][8]

사진 3의 베레모와 사진 4의 스웨터는 후대 촬영이다. 공용 자료의 제목이 ‘보후스식’이라고 할 뿐, 엠마 생전의 특정 디자인이나 1940년대 원본이라는 설명은 없다. 따라서 역사적 원본 사진 1·2와 같은 시대의 유물로 제시하지 않는다. 사진의 쓰임은 색이 눈에 띄는 요크·모자 표면을 확대해 보는 데 있다. 겉뜨기 바탕에 드문 안뜨기 코를 넣고 색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효과, 앙고라 혼방의 잔털이 무늬를 부드럽게 보이게 하는 효과를 박물관의 기술 설명과 대조해 읽자. 실제 게이지·혼용률은 사진에서 측정할 수 없다. [3][9][10]

사진 5의 라벨은 작은 종이 조각 같지만 역사 자료로서 중요하다. 보후슬렌 박물관은 협회가 활동할 당시 고객에게 실이나 도안이 아니라 완성된 옷만 팔았다고 설명한다. 라벨은 ‘누구의 옷인지’라는 구매자의 질문에 답하도록 붙는다. 하지만 라벨만으로 어느 여성이 뜨고 어느 디자이너가 무늬를 만들었는지까지 알 수는 없다. 제품의 이름과 생산 조직, 제작자의 이름은 같은 정보가 아니다. 오늘 복원 키트를 보고 당시에도 ‘무료 도안’을 배포했다고 쓰면 이 유통 구조가 뒤집힌다. [3][11]

독자가 보후스식 도안을 직접 뜨려면 먼저 원본 도안과 현대 복원 도안의 관계를 확인해야 한다. 박물관은 1990년대 말 솔베이 구스타프손과 함께 복원 컬렉션을 만들었고, 이후 수십 종류의 무늬를 다시 구성했다고 쓴다. 복원품은 역사 원본의 자료를 읽고 현대 실·치수·설명으로 옮긴 작업이다. 요크의 반복 단위와 줄임 위치만큼, 원래 원사와 대체 원사에서 안뜨기 코의 돌출과 앙고라 잔털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견본으로 확인하는 편이 정확하다. [3][4][5]

보후스식 스웨터의 후대 촬영
사진 4. 보후스식 스웨터의 후대 촬영 · © Eskil Malmberg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원본·이용 조건)

시간으로 다시 읽기

  1. 1883년 · 엠마 샤를로테 슈티아스니가 빈에서 태어난다. [1]
  2. 1936년 · 아우구스타 텡과 헬가 칼손이 지역 여성의 유급 재택 일을 요청한다. [1]
  3. 1938년 · 파겔비켄에서 장갑·양말을 위한 첫 편물 수업이 열린다. [1]
  4. 1939년 · 보후스 스티크닝 협회가 결성된다. [1][2]
  5. 1942년 · 울 70%, 앙고라 30%의 ‘eja’ 실이 공급된다. [1]
  6. 1950년 · 사업 공간을 굴드헤덴으로 옮기고 엠마의 운영 노동에 보수가 지급되기 시작한다. [1]
  7. 1969년 · 생산을 마치고 의복과 도안 자료를 박물관에 남긴다. [1][2]
보후스 스티크닝 의류 라벨
사진 5. 보후스 스티크닝 의류 라벨 · © Unionpearl / Wikimedia Commons · CC BY 4.0 (원본·이용 조건)

다시 읽으며

엠마 야콥손의 가장 큰 설계는 한 무늬의 소유가 아니라 한 벌을 가능하게 하는 체계였다. 일이 필요하다고 먼저 말한 아우구스타와 헬가, 수업을 열고 실을 공급한 사람들, 집에서 코를 만든 수백 명의 여성, 작품마다 이름이 다른 디자이너가 그 체계에 있었다. 보후스 스웨터를 볼 때는 색의 수만 세지 말고 라벨과 기록에서 빠진 제작자의 자리까지 생각해 보자. 편물의 고급스러움이 어떤 노동 위에 놓였는지 읽는 순간, 무늬는 더 풍부한 역사 자료가 된다.

사진을 읽을 때 사진 1: Erik Holmén 촬영, Nordiska museet / Wikimedia Commons, CC BY 4.0. 사진 2: E. Holmén 촬영, Nordiska Kompaniet 기록 / Wikimedia Commons, 스웨덴 사진 퍼블릭 도메인 표기. 사진 3·4: Eskil Malmberg 촬영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사진 5: Unionpearl 촬영 / Wikimedia Commons, CC BY 4.0. 사진 3·4는 1940년대 원본 의복이라고 확인되지 않으며, 사진 2의 의복 설계자는 안나리사 만하이머 룬이다. 각각의 사진 아래 원본 파일과 촬영 출처를 붙였다.

자료와 사진 출처

본문의 번호는 다음 원문 자료를 가리킵니다. 사진의 저작권·이용 조건은 각 사진 아래 원본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자료 1 · skbl.se
  2. 자료 2 · www.bohuslansmuseum.se
  3. 자료 3 · www.bohuslansmuseum.se
  4. 자료 4 · www.bohuslansmuseum.se
  5. 자료 5 · rohsska.se
  6. 자료 6 · samlingar.goteborgsstadsmuseum.se
  7. 자료 7 · commons.wikimedia.org
  8. 자료 8 · commons.wikimedia.org
  9. 자료 9 · commons.wikimedia.org
  10. 자료 10 · commons.wikimedia.org
  11. 자료 11 · commons.wiki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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